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(문단 편집) == 정치 == 리처드 1세는 상당 기간 동안 경이로운 군사적인 재능에 비하여 정치력은 부족한 [[암군]]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. 실제로 그간 한국에 출간된 조금 오래된 영국사 개론서들을 보더라도 리처드 1세에 대한 평가는 싸움만 잘하는 [[전쟁광]] 정도에 불과했다.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그가 단순히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'''왕으로서의 능력, 대전략안, 용인술''' 역시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. >리처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리를 선택하는 능력, 특히 휴버트 월터(Hubert Walter)의 선택이었다. 재판관으로서,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그리고 [[교황]]의 사절로서, 휴버트 월터는 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형적인 인물이었다. [[플랜태저넷 왕조#s-2.3|앙주 제국]]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[[잉글랜드]]에서도 리처드의 오랜 부재 기간 중 윌터의 감독하에 중앙 정부의 효율적인 통치 기구가 발달하였다. 신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하였지만, 전쟁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앙주 제국이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. >---- >『옥스퍼드 영국사(The Oxford History of Britain)』 中 유능한 기사로 알려진 [[윌리엄 마셜]]을 기용하거나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를 대법원장을 기용하고 잉글랜드의 재정을 알아서도 돌아가게 할 정도로 인사 배치는 무질서한 [[매관매직]]이 아니었다.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리처드 1세는 대단한 인텔리였고, 냉정한 비즈니스 맨 같은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재평가받고 있다.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포로 시절,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인맥을 다지기도 한다. 또한 리처드 1세가 조직한 잉글랜드 정부는 리처드가 런던 입성 후 몇 개월 뒤 프랑스와의 전쟁 선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간 일반에 알려졌던 영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었다. 여기에 그가 십자군 전쟁을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인 [[아키텐의 엘레오노르]]가 아키텐의 군주이자 잉글랜드 왕의 대리인으로서 내정 부분을 상당수 처리해줬다는 것과 종군 후에 휴버트 월터라는 걸출한 신하를 기용한 것도 플러스 요인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